완벽한 민주헌법 체계 갖춘 ‘임시헌장 10조’

윤경로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기억기념분과위원장

올해는 역사적으로 매우 뜻 깊은 해이다.

2·8 독립선언(동경)과 3·1 독립만세운동, 그리고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발족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이후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는 기념비적인 해이기때문이다.

임정은 3·1 운동이 발발한지 40일 만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 선포되었다.

봉건 왕조와 제국(帝國)의 시대를 마감하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대한민국’이 탄생되었다. 

이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역사변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3·1 운동을 ‘3·1 혁명’으로 부르자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된 것도 이러한 연유와 배경에 있다.

임정의 혁명적 성격은 ‘임시헌장 10조’에도 담겨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 10조.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 10조.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선포했다.

공화제 논의는 1890년대 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전후부터 대두되었지만, 국가정체를 ‘민주공화제’로 선포한 것은 처음이다.

나아가 일반백성이 주인이라는 ‘민주(民主)’를 앞에 내세워 그동안의 봉건왕조시대를 종식시켰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이라는 제2조는 의회중심의 내각제를 채택한다는 의미였는데, 그해 9월 통합정부로 개편하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게 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함”은 매우 진취적인 조항으로, 봉건왕조사회의 신분계급과 남녀귀천을 전면 부인하며 일체 평등을 헌법으로 제정했다.

제4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서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이라고 했다.

본래 초안에는 “조선공화국 국민은 신교, 언론, 결사 및 집회의 자유를 향유함”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서신, 주소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첨가해 자유권을 더욱 확대시켰다.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진다” 또한 초안에는 “조선공화국의 시민은 선거권 및 관리가 될 수 있는 권리를 가짐”이라고 되어 있었다.

당대 최고의 이론가였던 조소앙 선생이 초안했다는 이 조항은 남녀 구분 없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했다는 점으로, 당시 미국은 물론 일본도 여성들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사실을 감안하면 혁명적인 법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초안에 사용한 ‘조선공화국의 시민’이라는 대목은 국명이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공화국’이었음을 시사하며, ‘시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 또한 이채롭다. 

이밖에도 ‘인민’과 ‘국민’, ‘시민’을 구분해 사용한 점도 주목할 만한데, 향후 이에 대한 법률적, 개념적 차이를 연구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1919년 4월 11일 임시헌장을 선포한 날을 기념해 임정관계자들이 1947년 같은 날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제28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1919년 4월 11일 임시헌장을 선포한 날을 기념해 임정관계자들이 1947년 같은 날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제28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한편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유함”은 초안에 없었으나 새롭게 삽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조항은 국가운영을 위해 꼭 필요한 법적조항이다.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재정부담은 국민이 부담해야 한다는 점에서 마땅한 의무조항이며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제7조는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進)하여 인류의 문화와 화평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함”이다.

국제연맹 가입은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한 우드로 윌슨 28대 미국 대통령 (Woodrow Wilson)이 1918년 11월 세계 1차대전 종전 직전 민족자결주의 14개 조항과 함께 국제연맹 결성을 제창했다.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윌슨 대통령의 선언과 제안은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해 열강의 식민지에 있던 약소국가들에게 독립의 꿈과 희망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환영받았다.

대한민국임정 또한 이를 적극 환영하며 국제연맹 가입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윌슨이 제안한 국제연맹은 제국주의 열강은 물론 미국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실현되지는 못했다.

상당한 논란이 있었던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은 초안에는 없었던 내용으로, 구황실 출신 조완구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몽양 여운형을 비롯한 진보진영에서는 이 조항의 삭제를 주장했는데, 나라를 망친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것은 봉건왕조시대를 용인하는 것이기에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임정요인에는 이시영 등 구황실 출신 인사도 있었고, 당시 국민적 분위기 또한 아직 구황실을 단절하거나 배척할 만큼의 상황은 아니었기에 격론 끝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제9조는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를 전폐함”으로,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 하에서 자행된 생명의 존엄성과 신체형 파괴 등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삽입된 것으로 이해된다.

공창제 역시 일제하에서 묵인된 것이기에 이를 삽입한 것 같다.

끝으로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회복 후 만 1개년 이내에 국회를 소집함”에서는 국토를 회복하면 곧바로 새로운 의회를 소집해 새 정부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처럼 임시헌장 10개조는 매우 진취적이며 혁명적인 내용이며, 지금까지도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민주헌법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헌법은 그 정신과 내용을 그대로 전수했다.

하지만 당시의 임시헌장 법정신이 지난 100여년간 우리나라와 사회에 온전하게 실행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임정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역사적 성찰과 함께 임시헌장의 법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윤경로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기억기념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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